임진강을 건너온 역사 (4) 2. 고향, 이제현의 개성팔경 ① 천 년을 버텨선 뿌리 장단석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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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강을 건너온 역사 (4)
2. 고향, 이제현의 개성팔경 ① 천 년을 버텨선 뿌리 장단석벽
누구에겐 꽃피는 산골이고, 누구에겐 과수원 길을 돌아 닿는 그곳. 황소가 게으른 울음을 울고, 떠나온 자들이 차마 잊을 수 없는 곳. 고향, 고향은 실향이 아니고서는 설명할 수 없는 단어다. 실향이 비춰주는 거울 속 풍경이 고향이다. 실향의 감정이 클수록 고향은 선명해진다. 실향이 단순한 이주가 아니라 이산이거나 이민이라면 이때의 고향은 각각의 기억을 넘는 강력하고 집합적인 표상이 된다.
▲적벽에 핀 돌단풍
고려를 떠나 중국 땅 원나라에서 타국살이를 해야 했던 이제현은 개성팔경 노래를 지어 실향을 달랬다. 지금 많고 많은 팔경들이 저마다 고장을 빛내고 있지만 이제현의 팔경은 하나의 도시가 아니라 나라를 상징한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개성팔경은 마음속에 담긴 고려의 모습이다. 그에게 개성은 단순한 고향이 아닌 고국이었다. 이제현의 개성팔경은 전팔경, 후팔경 16개 장면으로 구성돼 있다. 이 가운데 임진강이 장단석벽이란 제목으로 후팔경에 등장한다.
“깡마른 뼈대로 천 년을 서 있으면서/ 푸른 뿌리가 백 리에 걸쳐 서리어 있다/ 푸른 물결 사이에 가로 세로 뻗어/ 그 일대가 옥을 띤 험한 산이 되었네// 사냥 말이 어찌 돌아보았겠으랴/ 어부는 단지 부질없이 볼 뿐/ 시인이 억지로 하늘 아끼는 곳 그리려다가/ 귀밑머리만 세게 된다.(이제현. 「장단석벽」 후편)”
이제현은 공무를 위해 중국대륙을 여행하던 시기에 장단구 송도팔경을 짓는다. 깡마른 뼈대로 천 년을 서 있다든지, 뿌리가 백 리에 걸쳐 있다는 석벽의 자세는 곤궁하게나마 버티고 선 당시 고려와 겹쳐진다. 억지로 그리려다가 머리가 셀 만큼 석벽은 아름다웠다. 이는 막막한 현실을 두고 흘러만 가는 세월에 대한 안타까움의 표현으로도 읽힌다.
이제현은 몇 년 뒤 감숙성에 유배된 충선왕을 찾아가며 다시 한 번 개성을 노래한다. 원나라에 머물던 충선왕이 서쪽 끝 티베트에 유배됐다가 막 감숙성 도스마로 옮겨온 때였다. 오랜 이역 생활 끝에, 먼 변방으로 쫓겨 간 왕을 만나러 가는 길에 하필 떠오른 것이 또 개성이었다.
중국에서 생활하던 이제현은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시를 많이 남긴다. “고국은 먼 구름 밑에 있고 가는 길은 불볕 속에 있다” 이 한마디만으로도 그의 고달픈 이국생활을 짐작할 만하다. 떠돌이 생활이 분주할수록 고향에 대한 생각도 선명해 지는 것일까? 고려인 누구도 밟아보지 못한 대륙의 먼 곳을 향하면서 이제현은 개성을 떠올렸다. 그리고 이제현은 개성팔경 노래를 중국의 소상팔경 시와 나란히 놓는다. 은연 중 고려가 중국 못지않은 나라임을 드러내려 한 것이다.
▲ 장단적벽
임진강은 고려와 조선시대 내내 시인들의 감흥을 촉발시키는 장소였다. 많은 이들이 임진강, 특히 장단석벽을 노래했다. 용암이 지나간 자리에 불쑥 솟아난 깎아지른 절벽은 범상하지 않았다. 시인들은 석벽을 적벽이라고 불렀다. 이제현이 담담하게 석벽이라 이름 한 곳에서 시인들은 중국의 소동파와 보름달과 적벽을 떠올렸다. 이상한 일이다. 먼 타향에서 이제현은 잡히지 않은 그리움을 담아 실물인 임진강을 눈앞에 재생시키려 했다. 막상 임진강이란 실물 앞에 선 사람들은 달랐다. 눈앞의 실체를 감각하기보다 중국 땅 적벽을 생각한 것이다. 떠난 자는 고향을 그리워했지만 떠나지 못한 자들은 타향을 동경했다. 이것은 세상의 모든 대칭처럼 짝을 이루는 감각인지도 모른다. 집 떠나면 집 생각, 돌아오면 또 다른 여행을 꿈꾸는 것처럼.
이재석 DMZ생태평화학교 교장, <임진강 기행> <걸어서 만나는 임진강> 저자
#10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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